산부인과 진료실은 역동적이다. 임신이 잘되지 않아 난임 치료를 해야 하는 환자의 다음 순서로 임신을 원하지 않아 피임시술을 해주어야 하는 환자가 들어오기도 한다. 임신이 확인되어 축하해 주면 뛸 듯이 기뻐하기도 하지만 난감한 표정을 짓는 환자도 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의 낙태죄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고통 받은 여성들과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 빛을 본 날이었다. 그러나 태아생명권에 대한 측면에서 종교계 등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우선이냐,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냐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싸움과 같다. 이념의 우위를 가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은, 윤리와는 달리, 최소한의 규제로 그 시대와 현실에 맞게 그러나 엄격한 판단으로 그 수위가 조절되어야 한다.

이번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재판부의 결정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순차적 논리로 판단되었다. (1)모든 국민은 그의 존엄한 인격권을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자신의 생활영역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그것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2)모든 인간은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형성 중의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3)임신한 여성도 국민의 일원으로 자신의 신체를 임신한 상태로 유지하여 출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 임신한 여성이 임신의 유지나 종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관, 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전인적 결정을 하는 것이다. (4)국가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연속적 발전과정에서 동일한 법적 효과를 부여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산부인과학계와 WHO가 현시점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시기) 경을 기준으로 하는 등 태아의 발전 단계별로 국가가 생명을 보호하는 입법적 조치를 취함에 있어 보호 정도나 보호 수단을 달리할 수 있다.

낙태허용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입법 사례를 보면 허용하는 임신의 기간을 제한하는 “기간 방식”과 낙태의 사유에 따라 허용하는 “적응 사유 방식”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임신 14주 이하에서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낙태를 허용하였으나 영국 경우는 24주 이하로 되어 있다. 미국은 주(州) 별로 다르다. UN의 조사에 의하면 2013년 현재 선진국 권역에서의 사유별 낙태 이유를 살펴보면 여러 사유 중 사회경제적 사유가 82%, 임신한 여성의 요청이 71%로 나타났다고 한다.

인간은 여타 동물과 달리 종족보존의 목적 외 남녀의 유대관계 또는 쾌락의 목적으로도 성행위를 한다. 그 결과물로서 임신은 온전히 여성의 몸에 남는다. 원하지 않은 임신을 피하기 위한 피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하는 피임 방법 중 어느 하나도 완벽한 것은 없다. 정관수술을 하여도 정관이 다시 길을 내어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몸이다. 아무리 현대 의학과 피임이 발전하였다고 하여도 원하지 않은 임신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과거 우리나라 형법의 낙태금지 조항은 현실적으로 많은 선량한 여성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방치한 것과 같다. 게다가 모자보건법에서 두는 예외조항은 허점투성이이다. 모자보건법 14조에 의하면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유전학적 질환이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이나 준강간에 의한 임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친 인척간의 임신, 임신의 지속이 보건 의학적 이유로 산모에게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임신 24주 이내에 한해 예외적으로 임신중절을 허용하도록 되어있다.

강간이나 준강간과 같은 법률적 판단이 요구되는 경우는 그 판정을 기다리다가 이미 출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또한 무뇌아와 같이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사망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기형이 확인되어도 태아 문제에 해당하는 조항이 없으므로 임신한 여성은 정신적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하여야 한다.

이제라도 낙태죄가 헌법불합치로 결정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지 5년이 넘도록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지침이 될 모자보건법 등 낙태죄 관련 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부유하고 있다. 종교계의 거센 반대와 함께 민감도가 높은 법안이라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모자보건법 개정안 발의를 두고 조심스러운 분위기라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낙태죄가 부유하는 동안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여전히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악용하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의사의 자기선택권에 대한 법적 보장에 대한 조항도 기다려진다.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