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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健康챙기기 (2024년 3월(663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3-15 조회수 : 6 파 일 :



    나이에 관계없이 건강 챙기기는 모두의 과제다. 건강해야 소망을 성취할 수 있고, 포부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90후반에 들어서 老化現象이 나타난 나도 건강챙기기는 피할 문제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보청기 신세를 지고 있다. 젊었을 때 齒痛이 생기면 이를 빼어 버렸다. 옆의 이가 흔들리면 이 이도 빼어버렸다. 현재 위턱에는 이가 없다. 아래턱도 좌우 앞니 두 개씩, 모두 4개의 이만 남아있다. 이 때문에 위턱은 완전 틀니이고 아래턱은 앞니만 뺀 부분 틀니이다. 근래는 틀니기술이 좋아져서 불편 없이 음식을 씹는다.

     

    1945년 중학교 졸업 후 시작한 흡연을 1991년에 끊었다. 담배 흡연자가 肺疾患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했다. 苦學할 때라 담배 살 돈이 없어 길에 벌여진 꽁초를 주어 신문지 조각에 말아서 피우기도 하였다. 어느 날 잡지에 間接吸煙의 피해에 대한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나의 담배연기를 마신 옆 사람이 흡연자보다 해가 더 크다고 쓰여 있었다. 한참 자라는 집 아이들도 그렇고 자주 만나는 친구들을 의식하여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였다. 1991년 연말 늦은 밤에 만난 골초 선배가 1주일 전에 담배 끊었다며 목이 개운하다고 하며 나에게 담배 끊기를 권하였다. 그리고 담배 갑과 라이터를 내 놓으라고 하였다. 그날 밤 늦게 담배와 라이터 없이 귀가하였다. 물론 근처 담배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아침 기상하여 화장실 갈 때나 신문을 읽을 때 의례히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 습관인 나는 결국 담배 없이 아침을 보냈다. 출근하여 의례히 직원이 사무실 탁상 위에 가득 채운 담배상자를 보게 된다. 당연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어야 했지만 그날 아침은 참았다. 이렇게 흡연, 단연의 갈등이 1주일 계속되었다. 결국 단연의 의지가 이긴 것이다. 나의 오랜 친구는 담배 끊을 만큼 독한 사람과는 상종할 수 없다며 감탄하였다. 물론 그 뒤 담배를 입에 물어 본 일이 없다. 물론 담배 끊은 것이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되었음은 틀림없다.

     

    나는 체질적으로 술에 약하다. 가능하면 회식 때 술잔에 손대지 않는다. 그런데 대학에서 학생과장 등 여러 보직을 맡은 나는 자주 교수들과 회식을 하였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술잔을 피할 수 없었다. 2, 3일 이어지는 宿醉로 고생한 일이 생생하다. 10여 년 전부터 高血壓 高脂血症과 관련된 ,服用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받는 健康診斷 결과도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서울대학교 후문 쪽 국제백신연구소 내 한국후원회 사무실로 출근한다. 관련하고 있는 각종 단체의 모임에도 거의 빠짐없이 참석한다. 이 나이에 그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이다.

     

    건강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나는 3가지를 댄다. 첫째는 小食이다. 젊었을 때 12지장궤양을 앓은 이후, 幽門이 좁아졌고 음식 섭취량은 보통 사람의 또는 그 이하로 줄었다. 아침에 든 음식물이 위를 빠져 나가기 전에 점심, 그리고 이어서 섭취한 저녁 식사가 자연히 위에 부담을 준다. 그래서 점심은 의례히 우유 한잔이다. 나의 영양실조를 염려한 內子가 음식물 재료 선택과 조리에 신경을 쓰니 감사할 뿐이다.

     

    둘째는 運動이다. 젊었을 때 硏究室에서 먹고 자고 하는 생활이어서 운동과는 인연이 없었다. 1975越南敗戰 敎授를 새벽에 民防衛訓練 구실로 대학 운동장으로 소집하였고 구보를 시켰다. 소집 첫 날 學長인 나는 自然科學大學 교수대열 앞에 섰으나 몇 발자국 못가서 주저앉았다. 연구실 생활에만 몰두한 나는 운동이라고 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나의 연약한 體力에 충격을 받았다. 체력보강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는 걷기운동을 시작하였다.

     

    1975년 여름 새벽 5시에 일어나 城北洞 집에서 三淸터널까지의 한 시간 걸이의 오르막길을 걸었다. 시간을 재게 되면서 걸음이 빨라졌다. 이렇게 2년을 지속하였다. 그 뒤 달리기(조깅)로 바꾸어 市內 거리 10km를 달렸다. 달리기운동은 지방출장이나 외국여행 때도 이어졌다. 조깅은 14년 동안 계속되었다. 1987년 서울대학교 總長公館으로 入住한 후에도 4,5개월 동안 이른 새벽 교내 순환로를 달렸다. 그 뒤에는 새벽 달리기를 그치고, 대신 토, 일요일에 冠岳山 정상까지의 오르기 운동을 시작하여 수년간 지속되었다.

     

    1991, 총장 퇴임 후 사당동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이른 새벽, 관악산 중턱까지 왕복하였다. 빠른 걸음이라 땀으로 범벅인 채 집으로 돌아왔다. 2003년 내방역 근처로 옮긴 뒤에는 서리풀 공원이 나의 운동 장소가 된다. 집에서 나와 10분 걸으면 100여 미터 언덕에 이르고 이를 오르면 정상에 왕복 5분이 평지가 나온다. 평지 끝, 청권사 바로 뒤에는 팔, 무릎, 허리 운동시설이 있어 그곳 운동기기로 10여 분 몸을 푼 후, 한 시간 반 쉬는 일 없이 공원 내를 걷는다. 집에 돌아오면 한 8천보가 된다. 사무실 등에서 걷는 걸음 수를 합하면 하루 1만보를 걷게 된다. 90후반의 나이지만 아직은 무릎관절이나 허리가 건강하니 걷는 자세도 꼿꼿하다.

     

    셋째는 마음 비우는 일이다. 마음을 비우니 욕심이 없으며 따라서 스트레스에서 해방된다. 나는 여러 公私機關의 임원으로 선임되었지만 地位에 욕심을 낸 일이 없다. 다만 주어진 일에 충실히 봉사했을 뿐이다. 나는 1991년 교수직 퇴임 후에도 매일 아침 10시 내가 유치한 국제백신연구소 내 한국후원회 사무실로 출근한다. 퇴근 시간은 오후 4시다. 이 나이에도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은 나의 큰 복이다. 이처럼 나의 건강은 小食, 運動 그리고 마음 비운 생활의 결과라 하겠다. 앞으로도 이 같은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전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회 위원장,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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