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뮤니티
  • 관련 사이트
  • 간/행/물

    Introduction

    • 국제인권보
    • 인권보 칼럼
    리틀록 9인의 용기 (2024년 1월(661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15 조회수 : 63 파 일 :



    미국의 흑인 인권이 개선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1863년에 발표한 링컨의 노예해방선언과 그로부터 2년 뒤에 비준된 수정헌법 제13(노예제 폐지)자유인의 신분은 얻었지만, 그 이후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계속되었다. 이른바 짐 크로 법의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미명아래 차별은 1964년 민권법이 제정될 때까지 사회 곳곳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분리 자체가 평등이 아닌데 말이다.

     

    훗날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재키 로빈슨은 1947년에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그 무렵의 흑인 야구선수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니그로리그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그는 10년 동안의 선수 생활 내내 관중과 동료 선수, 심판들로부터 참기 힘든 멸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뉴욕타임스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칭했을까. 그나마 그 시절 백인과 같이 뛰는 것을 허용한 야구계는 그래도 관대한 분야였다.

     

    1950년대까지 미국 남부에서는 버스나 기차, 식당 같은 곳에 흑인과 백인이 같이 앉을 수도 없었다. 195512,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버스의 흑인 전용 좌석에 앉아 있었는데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는 1960년대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들이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800m를 뛰어야 하고, 커피포트조차따로 써야 하는 상황이 묘사되어있다.

     

    역시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린 북>에는 저명한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가 남부 투어 중 연주 장소의 백인 전용 식당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영화제목 <그린북>은 그 당시 남부 지방을 여행할 때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식당 정보를 소개한 안내서였다.

     

    상황이 이런 지경이니 교육 현장에도 예외 없이 인종차별이 횡행하여 남부의 흑인들은 백인학교에 갈 수 없었다. ‘리틀록 9은 그즈음 백인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용감하게 등교 투쟁을 벌였던 아홉 명의 흑인 학생들을 일컫는 호칭이다.

     

    1954년에야 미국 연방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을 각각 다른 학교에 다니도록 규정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을 근거로 1957년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우수한 흑인 학생 9명을 뽑아 아칸소주의 리틀록 센트럴 고교에 등록시켰다. 원래는 17명이 등록하려 했으나 그중 8명은 지역 백인들의 엄청난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였다.

     

    리틀록 9은 개학하는 9월 초부터 여러 차례 등교를 시도했으나 매번 수많은 백인 학생과 학부모 및 인종차별주의자 시위대의 폭력적인 저지로 실패하였다. 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죽여라, 죽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침을 뱉기도 했다. 심지어 주지사 오벌 포버스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지지하여 주방위군과 경찰까지 동원해서 그들의 등교를 막았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여론이 들끓자 격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주방위군의 통수권을 주지사로부터 회수하고 지휘계통에서 배제 시켰다. 그런 다음 육군 공수부대와 주방위군을 현장에 투입하여 아홉 명 흑인 학생들의 등하교를 한 학기 동안 철저하게 보호하였다.

     

    리틀록 9은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묵묵히 학업에 매진했다. 이듬해에 9명의 학생 중 어니스트 그린이 처음으로 졸업하였다. 졸업식 당일 교장은 어니스트에 대한 린치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제보를 받고 그의 안전을 우려하여 식장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유하고 집으로 졸업장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꿋꿋하게 졸업식에 참석하였고 불미스러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9명의 학생 중 가장 어렸던 카를로타 래니어의 집에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 사고로 다친 사람은 다행히 없었지만 집은 크게 훼손되었다. 그런 사고와 핍박을 겪으면서도 학생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전원이 무사히 졸업하였다.

     

    리틀록 9사건은 지금까지도 어린 학생들이 앞장서서 고난을 이겨낸 흑인 인권 운동의 대표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2007, 미국 조폐국은 리틀록 9인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다. 2008, 그들은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취임식에 초청받아 자리를 빛냈다.

     

    세계 최고의 선진국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화장실과 대중교통을 함께 이용하고 식당에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노예해방선언을 하고 1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인권은 용기 있는 사람들의 헌신과 함께 느린 속도로 나아진다.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이전글 : 21세기 사회지도층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열 가지 가치관 (2023년 12월(660호))
    다음글 : 시급한 저출산 문제-출산 친화적 사회 만들어야 (2024년 1월(661호))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