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우리나라를 두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현대 사회가 ‘죽음의 문화’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음을 심각히 우려하였다. 사회의 강력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경향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죽음의 문화를 활발하게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인, 전쟁, 폭력, 테러, 집단학살, 낙태, 안락사, 생명 조작과 파괴...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별로 충격적이지 않게 다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음의 문화’에 지배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는 세력으로 ‘공권력’과 ‘여론’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권력이란 국가가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곧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인간 권리의 침범할 수 없는 국면을 보호하고, 그 의무들을 완수하는 것이며, 따라서 공권력의 행위는 인권의 존중을 전제로 그 직무를 수행한다. 이에 잘못된 법령은 구속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년 전 헌법재판소는 기존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정 이후 우리나라는 낙태 합법화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작년 시한의 대체입법은 마련되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산부인과 의사들 가운데서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낙태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낙태를 거부하면 혹시 낙태거부죄로 처벌받는 것 아닌가?” 낙태가 합법화되었는데 이를 거부하면 법적 제재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일부 의료진들의 ‘황당한 두려움’이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으로서 양심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론에 떠밀려 법률이 만들어지고 그 법률이 개인의 양심을 움츠리게 한다면 그 법률이나 그것을 끌어낸 여론이 ‘죽음의 문화’의 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우리 사회에서 ‘말기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 중단’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소위 ‘존엄사법(안)’으로 발의된 법률안은 “연명치료 중단을 방해한 자나 말기환자의 의사에 반하는 연명치료를 하는 담당의사 및 의료기관 장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이는 연명치료 중단을 안락사로 판단하는 의료진이 양심에 따라 말기환자의 연명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법률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처벌받는다는 반인권적 법률(안)이었다.

영국의 대법관이며 재상이었던 토마스 모어(1478-15354)는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양심의 권리를 옹호한 위대한 법조인이다. 당시 영국 왕 헨리 8세의 새로운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고,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거부한 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토마스 모어는 서명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인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데에 있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을 죽음도 감히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증거한 것이다.

양심은 이렇게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인간 존엄성의 최후 보루이다. 그런데 인권의 침범할 수 없는 국면을 보호하고, 그 의무들을 완수하는 공권력으로서의 법률이 개인의 기본권으로서의 양심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죽음의 문화’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인간 생명의 분야에서도 많은 강제를 규정하는 법률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부터인지 ‘인간 생명’에 대한 담론들이 윤리의 영역에서 법률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강제에 대한 ‘양심적 거부’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