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8년차.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고야 알았습니다. ‘나’보다 소중하고 뭉클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이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도 있는 게 엄마인지를 말입니다.

아나운서 16년차. 종종 2008년부터 2012년까지 KBS 9시 뉴스를 할 때 기억에 남는 뉴스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신출내기 앵커가 된 지 몇 달도 안 됐을 때 끔찍했던 아동성범죄 사건이 큐시트에 올랐습니다. 처음 ‘나영이 사건’으로 처음 보도했던 ‘조두순 사건’입니다. 아이가 중상을 입을만큼 끔찍해서 9시 뉴스에 나와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가, 모방범죄를 부르지 않을까 회의 시간 의견이 엇갈릴 정도였습니다.

12년이 흘렀습니다. 글눈이 밝아 배달오는 신문을 엄마보다 빨리 읽는 딸은 “엄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감옥에서 나올 수 있어?”라고 묻습니다. 제 입으로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던 날 ‘조두순이 감옥을 나온다면 내가 지금 출산을 해도 아이가 12살 밖에 안 되는구나’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리고 정말 엄마가 된 지금, ‘야수’가 돌아옵니다. 피해자가 여전히 살고 있는 동네로.

뉴스 속에 고통받는 아이들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여행용 가방 안에서 숨진 아홉살 소년. 멍투성이 몸을 이끌고 탈출한 열살 소녀. 엄마 없이 라면을 끓여먹다 난 불에 생사를 오가는 형제까지. 요즘은 코로나 19 때문에 다른 집 아이들이 더 걱정됩니다. 우리 아이들이야 제가 화상수업도 밥도 챙겨주겠죠. 하지만 학교에 가지 못한 이 긴 시간, 방치되고 학대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혹시라도 부모들 손길이 뜸한 틈에 성범죄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없을까...저도 모르게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우연한 기회로 조두순 사건 피해 아동 부모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짧게나마 그 가족이 12년 간 겪은 일들을 아무도 헤아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뚜벅뚜벅 살아냈지만 어린 시절을 도둑질한 나쁜 놈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피해자는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대상으로 한 어떤 종류의 범죄도, ‘관용’이나 ‘용서’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가정에서 학대 받는 아이들은 또 어떨까요. “집에서 말하지 말랬어요”라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그널을 보낸다고 합니다. 집밥을 못 먹어 밖에서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던지, 철 지난 옷을 입거나, 작은 일에도 펑펑 울거나, 심각한 저체중이거나... 이 모든 것이 힘없는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보내는 시그널입니다. 2016년 계모 학대로 세상을 떠난 원영이가 보낸 시그널이기도 했습니다.

엄마이자 앵커로 고통받는 아이들 이야기를 전할 때 더 강력한 아픔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아동성범죄의 경우 화학적 거세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충동이 사라졌다고 해를 끼칠 가능성이 0이 될까요? 아이들을 짓밟는 방법은 성폭력 말고도 있습니다. 피의자가 가까운 공간에 오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된다는 걸,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와 영원히 격리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할 겁니다. 조두순 사건만 해도 12년이나 흐르는 동안 왜 피해자가 이런 공포를 다시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학대 방치 어떤 방식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권'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소중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길 포기한 이들에게도 똑같이 인권을 보장해주어야 하는지는 회의적입니다. 동물이나 어린 아이들처럼 약한 자들이 얼마나 보호를 받는지에 따라 한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이중처벌을 할 수도 인권을 빼앗을 수도 없다지만, 우리의 미래세대인 아이들에 대한 범죄는 얘기가 다릅니다. 인권에도 우선순위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코로나 19로 오랜 시간 집에만 있던 큰 아이가 학교 가기 바로 전날입니다. 내일 등교길에서도 혹시 시그널을 보내는 아이들은 없을지, 유심하게 살펴볼 요량입니다. 비대면 수업이 늘었다니만 그 와중에도 선생님들이 아이들 안부를 꼼꼼히 챙겨주셨으면 합니다. 씨씨티비 없고 외진 곳에서 조두순 사건처럼 무지막지한 범죄에 희생당하는 아이들은 없을지, 사회도 예방하고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저보다 소중하고 뭉클한 아이가 어린시절을 지키며 안전하고 행복하게 크기를, 그리고 남의 집 아이들도 그렇게 커나가기를 8년차 엄마 16년차 앵커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