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지식정보 사회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명언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 지식과 정보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현대사회에서는 실용적 정보에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깊이 접근할 줄 아는 능력이 인생의 성패를 가른다. 컴퓨터시대의 지식은 현실적 이해관계에 직결된 정보의 생성·취득·분석·교환 등 민첩한 정보처리능력을 뜻한다. 알면 아는 만큼 이익을 얻고, 모르면 모르는 만큼 손해를 보는 세태다. 오늘날의 앎은 지극히 개인적·이기적이어서, 현실의 이해관계에 대처하는 실용적 수단쯤으로 인식될 뿐이다.
예전의 앎은 그렇지 않았다. 선현(先賢)들의 지식은 학문이나 치세의 경륜을 궁구 (窮究)하여 나라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공동체적 성격이 두터웠고, 아울러 인격을 갈고 다듬는 윤리적 면이 강했다. 지식은 현실적 실용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공동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고차원의 가치였다. 옛 선비들의 앎은 곧 그들의 삶이자 인격이었다. ‘앎’과 ‘삶’은 비록 글자 한 획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망망대해의 양끝 해안만큼이나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
그래서 공자·주자·퇴계 등 동양의 현인들은 ‘지식은 행동이요 앎은 곧 삶’이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왕양명은 한걸음 더 나간다. 그는 지와 행이 본래부터 하나임을 강조한다. ‘사물의 이치는 원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며(心卽理) 그것을 본성적으로 아는 것이 양지(良知)’라는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설파했다. 양지는 우주의 삼라만상과 소통하는 인간의 실존적 주체성이며, 뭇 생명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하는 진정한 앎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행합일’의 명제도 ‘아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실천론이 아니라 ‘지와 행은 둘이 아니라 본래 하나’라는 존재론으로 풀이된다.
옛 현인들의 지행론을 장황하게 들먹이는 이유는 ‘앎과 삶’의 문제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앎과 삶의 문제를 실천론으로 파악하든 존재론으로 접근하든, 지행일치를 강조하는 점에서는 아무 다름이 없다. 문제는 앎과 삶이 실생활에서 항상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머리로 아는 앎이 있고, 몸으로 아는 앎이 있다. 배워서 이해하는 앎이 있고, 삶으로 체득하는 앎이 있다. 앞엣것은 유용한 지식이지만, 뒤엣것은 삶의 지혜다. 삶으로 이어지지 않은 앎은 공허한 거짓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애쓴다 해도 ‘어떤 삶을 위한 앎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인적·이기적인 삶이 있는가 하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상생(相生)을 우선시하는 이타적·공동체적 삶이 있다. 개인적·이기적인 삶에 봉사하는 지식은 상쟁(相爭)의 도구일 뿐, 인격의 성숙이나 공동체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앎이란 모름지기 삶의 깊이와 공동체의 상생을 지향하는 것일 때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왕양명이 말하는 양지일 것이다.
중세 가톨릭과 스토아철학의 세례를 흠뻑 받은 ‘보편성’의 옛 절대정신은 오래 동안 신과 도덕의 권위로 인간의 정신을 옥죄어 왔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개성은 보편성의 경계를 벗어난 광기(狂氣)로 치부되거나 금기시(禁忌視)되었다. 니체가 신과 도덕률에 대하여 ‘실존의 반역’을 감행할 때까지, 자유로운 인격의 주체는 보편적 절대가치의 굴레 속에서 숨 죽여야 했다. 실존주의의 등장으로 보편성의 족쇄를 벗고 허허로운 자유의 벌판에 내던져진 새 인간상의 핵심은 ‘주체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방황하는 실존일 뿐, 구체적 개인들은 무신론과 과학만능주의, 자유방임과 무한경쟁의 새로운 시대정신에 내몰려 또 다른 획일적 세계 속의 객체로 전락해갔다. 허무의 개별적 주체들은 있었지만, 자유로운 사회공동체는 등장하지 못했다.
보편성과 주체성의 양극에서 절망한 인간정신은 이제 자유사회(Free Society)의 새로운 인간상을 모색하는 기나긴 변화의 여정에 서있다. 인간은 각자의 주체성 위에서 각기 따로 호흡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서로의 날숨과 들숨을 교환하며 실존의 의미와 깊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유기적․관계적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보편성’의 산맥을 넘고 ‘주체성’의 골짜기를 지나 드디어 ‘관계성’의 대지에 다다랐다. 관계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말로 너와 나의 상생을 위한 참된 앎이라 할 수 있다. 독선의 도그마, 인간성 위에 군림하는 이데올로그는 공동체의 삶과 사회적 관계성을 위한 올바른 앎이 되지 못한다. 국민화합·사회통합이 절실한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이즈음, 서로의 관계성을 지향하는 앎과 삶의 모색이야말로 좌우의 이념 갈등으로 분열의 골이 깊을 대로 깊어진 우리 사회가 골똘히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상생의 과제라 믿는다.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전 서울행정법원장, 숙명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