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연고도 없던 안동 도산으로 내려와 지낸 지 어느 덧 10년이다. 오랜 기간 경제 관료로 지낸 필자가 이처럼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은 퇴계 선생(退溪 李滉, 1501~1570)의 고향인 이곳 도산에서 그의 삶과 선비정신의 향기에 흠뻑 젖어들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퇴계 선생은 조선을 대표하는 큰 학자다. 필자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산에서 마주한 퇴계는 학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삶을 살아간 참선비였다. 선생은 신분제 사회를 살면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한 선각자였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향기를 인권이 강조되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필자로 하여금 이곳 선비수련원에 10년이나 머물게 하였다.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퇴계선생의 인간 존중 일화 몇 가지를 꺼내보려 한다.

서울 성균관에서 유학 중이던 맏손자 부부가 아들과 딸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그러나 맏손부가 젖이 부족하였고 갓 낳은 딸에게 젖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아들을 기르기가 힘들어졌다. 때마침 도산에 계시는 할아버지 퇴계 선생 댁에는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하녀 학덕이가 있었다. 그래서 맏손자는 하녀를 서울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러면 하녀의 갓난 애가 어미와 떨어져 죽게 될 것을 걱정한 퇴계 선생은 ‘남의 자식을 죽여서 내 자식을 살리는 일은 심히 불가하다(殺人子, 以活己子, 甚不可)’는 선비들의 필독서 「근사록」의 한 구절을 깨우쳐 주면서 한양에서 유모를 구하거나 암죽을 끓여서 먹이다가 이곳 학덕의 아이가 젖을 떼면 보자는 답장을 보냈다. 이 일로 불행하게도 증손자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에 하녀는 인권은커녕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었으며, 주인이 체벌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하녀를 보내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배려한 것이다. 결코 신분을 사람 위에 두지 않은 것이다.

나이 어린 제자에게도 이어졌다. 장유유서가 강조되던 시대, 노스승 퇴계는 젊은 제자들에게도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다. 58세의 당대 최고 학자 퇴계의 글을 보고 옳고 그름을 질문하는 편지를 보내온 갓 벼슬길에 출사한 26살 아래의 젊은 학자 고봉 기대승(1527-1572)과는 지위와 나이, 거리, 생각의 큰 차이 등에도 불구하고 8년여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했다. 바로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변」이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오히려 학문의 발전을 이루고 서로 매우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가 되었다. 나이를 떠나 학자의 길을 걷는 후배의 의견을 존중하여 자신을 ‘황(滉)’이라 낮추고 상대를 ‘공(公)’이라 높이며 성실히 답한 퇴계 선생의 낮춤의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35살이나 어린 청년 율곡 이이(1536-1584)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23살의 율곡을 ‘공’이라 칭하며 도학을 이어갈 기둥이 되어 달라는 당부와 함께 학문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다. 이처럼 퇴계 선생은 어떤 제자에게도 ‘너’라고 하지 않으며 경청하고 존중했다.

다른 이에게도 이러한데 집안에서는 어떠했을까? 선생은 남성우위의 시대를 살면서도 집안 여인들을 매우 아꼈다. 첫 부인 사별 후 맞은 재취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매우 난처한 일을 자주 저질렀으나 나무라는 일 없이 보듬었다. 맏며느리에게는 배려 깊은 다정한 시아버지였다. 가족간에 당연시 여길 일 이를테면 옷을 지어 보낼 때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늘 고마움을 표했던 퇴계 선생을 맏며느리는 진심으로 존경했다. 훗날 선생의 장례 기간 중 세상을 떠나게 된 며느리는 ‘살아생전 못다 한 효도 죽어서라도 할 수 있게 아버님 묘 아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퇴계의 묘 바로 아래에 맏며느리 봉화금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퇴계 선생은 왜 이토록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였을까? 그것은‘ 너와 나는 하나(物我一體)’라는 그가 배운 유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만인이 한 형제이고 만물이 이웃인데 어찌 인간을 존중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은 배워서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지행병진(知行竝進)의 삶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지식과 실천이 괴리되어 있는 현대의 지식인과의 큰 차이점이다.

오늘날은 인권 개념이 태동하고, 또 누구나 이를 보장받아야 하는 인권시대다. 인권은 곧 인간 존중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이기심과 물신주의가 나날이 커져간다.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이해타산으로 상대를 대한다. 그 결과 ‘갑질’은 늘어만 간다. 이러한 시대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내가 존중받길 원하면 먼저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己所不欲 勿施於人)이다. 부디 퇴계 선생의 인간존중을 거울삼아 지도층이 먼저 앞장서 실천하여 모두가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가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