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평화와 인류화합을 이념으로 하는 근대 올림픽의 캐치 프레이즈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us, Altus, Fortius)이다. 여기의 ‘더 힘차게’는 ‘더 힘껏, 더 멀리’라는 뜻으로도 새길 수 있겠다. ‘더 높이’는 높이뛰기 선수들만의 목표가 아니다. 모든 경기자들은 시상대의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제 나라 국가가 연주되는 것을 듣기 위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혹독한 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더 멀리’는 각종 던지기, 넓이 뛰기 선수들의 꿈이다. 물론 올림픽 구호의 꽃은 ‘더 빨리’일 것이다. 마라톤과 중․단거리 달리기 등 육상종목은 물론 수영, 트랙경기, 철인경기에서도 가장 빨리 목표에 골인하는 선수가 우승을 차지한다.
그런데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는 이제 스포츠에만 한정된 구호가 아니다. 현대 경쟁사회에서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는 사회 각 부문의 기능과 인간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는 삶의 원리처럼 되었다. 건물만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산악인들만 더 높이 오르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더 높은 성취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동차 속도만 더 빨라지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정보통신기술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전달속도를 빠르게 경신해가는 중이다. 비행기나 우주선들만 더 멀리 날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무역회사들마다 지구 곳곳의 더 먼 장소에까지 새로운 상품을 들고 달려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모두가 더 빨리 달려가려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무슨 바보인 듯 ‘더 느리게’ 휘적거리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시대에 자기 삶의 자리를 ‘더 낮게’ 내려잡으며, 더 멀리 나아가려는 사람들 틈에서 무엇엔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이단아(異端兒)들이 언뜻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시대를 거꾸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그러나 결코 바보가 아니다. 시야의 폭이 보다 넓은 것이고, 마음이 보다 넉넉한 것이며, 인품이 보다 묵직한 것이다. 혹은 성서가 말하는 겸손일 수도 있겠다. 낮은 곳, 소외된 자리를 향하는 애틋한 연민, 느릿한 관조(觀照)와 성찰,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히 하는 친화력… 그 중후하고 위엄 있는 품성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야말로 시대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의 성취 욕구는 결국 ‘더 크게, 더 넓게, 더 많이’라는 탐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적 효용성이라는 오늘의 시대정신과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의 신념은 ‘바르게 살기, 참되게 살기’의 올곧은 정신에서만 솟아날 수 있는 인격적 덕목이자, 공동체의 삶을 내실 있게 만드는 고귀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잘 살아보세’라는 조국근대화의 옛 구호는 ‘바르게 살자’는 윤리성의 결핍으로 인해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황금만능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8천만이 모여 사는 이 비좁은 한반도에서, 남쪽은 비만의 살과 피나는 전쟁을 벌이며 제가 실컷 먹어 쌓아놓은 지방덩어리를 도로 뽑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반면에, 저 어둑한 북녘 땅에서는 살가죽이 움푹 들어간 수많은 어린이들이 오늘도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아야 하는 끔찍한 모순이 무슨 일상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아니, 북쪽에까지 갈 것도 없다. 반도체와 외환시세 덕분에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오르내리며 복지와 인권의 천국을 지향하는 이 나라에도 나날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실업자와 극빈층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금도 우리 곁 가까이 어디에선가는 또 누군가가 천시(賤視)와 빈곤에 시달리며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낮고 느린 자리에 나앉은 이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로는 인권과 복지국가의 꿈을 이룰 수 없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의 도그마가 천박한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현실적 효용성의 성취 욕망을 감시, 비판함으로써 품위 있는 삶의 공동체를 이뤄가는 성찰이 아쉽다.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의 보람을 아는 두툼한 인문정신… 모두가 가격을 궁금해 하는 시대에 참된 가치를 찾아 헤매고, 누구나 성장을 추구하는 세태 속에서 내밀한 성숙을 지향하며, 영광을 좇는 사람들 가운데서 스스로 고난과 희생을 무릅쓰는 우둔함 말이다. 그 고상한 어리석음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랑의 바탕자리이자 인권 존중의 첫걸음이라는 믿음에 아무 의심이 없다.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전 서울행정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