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이자 우리 대한민국의 구성원리이다. 그 때문에 흔히 우리나라를 민주적 법치국가라고 부른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현대 입헌주의 국가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규범적 원리로 인정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국가의 구성원리로 수용되어야만 비로소 시민의 인권과 기본권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현대사가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독재정권 시절에는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인권이 손쉽게 짓밟히고는 하였다. 또한 헌법이 단지 장식적인 존재로만 머물던 당시에는 법률이 아닌 긴급조치만으로 시민의 인권이 침해되고는 하였다. 다행히 민주화가 진척되고 헌법재판 등을 통해 법치주의가 실질적 원리로 자리매김하면서 시민의 인권과 기본권이 현실적으로 보장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우리의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그 무엇보다 필수적인 조건이자 원리가 되고 있다.

‘민주적 법치국가’라는 개념이 시사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법치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대중의 독재로’, 민주주의 없는 법치주의는 ‘전문가의 독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민주주의를 통해 제정된 법률에 따라 법치주의가 구현되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의미의 법치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갈등 없이 상호적으로 결합되어야만 시민의 인권과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민주적 법치주의가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이른바 ‘적폐청산’이 진행되면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충돌하는 문제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청와대 청원민주주의’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시민들은 이미 처벌을 받은 성범죄자를 다시 처벌해 달라고 청와대 홈페이지에 청원한다. 형집행을 받고 있는 성범죄자를 ‘재심’하여 더욱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불이익재심’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오직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는 ‘이익재심’만을 허용하는 우리 형사소송법에서는 인정될 수 없다. 시민들의 민주적 청원이 법치주의와 충돌하는 것이다. 또한 시민들은 적폐세력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거나 제1심보다 형량을 낮추어 판결한 제2심의 판사들을 청와대가 파면하라고 요청한다. 이들 판사들은 적폐세력에 동조하는 적폐판사이므로 대통령이 직접 파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원 역시 현행 법체계와 충돌한다. 현행 법체계는 법치주의의 하부원칙인 권력분립원칙에 따라 사법부에 속하는 판사가 대통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독립해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국민청원제도가 그 동안 법체계가 축적해 놓은 법치주의의 여러 제도적 장치들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현 정부가 추구하는 두 목표가 오히려 적폐청산과정에서 서로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민주적 법치주의’가 서로 분열되는 현상을 현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민주주의가 필수적인 만큼 법치주의 역시 필수적이라는 점을 지금 여기서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민주적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판사이기에 오히려 다수의 독재로부터 소수자의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김영란 전 대법관의 주장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갈등을 빚고 있는 오늘날 진지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법체계가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제도화한 권력분립원칙은 그 아무리 대중의 지지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여전히 존중해야 하는 법치주의의 핵심적 내용이다. 사법부의 판단이 우리의 요구수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섣불리 권력분립원칙을 해체하면, 이후에 이보다 더욱 큰 위험이 우리에게 엄습할 것이다. 그 점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갈등을 빚고 있는 요즘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다시 화해를 이룰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직 ‘민주적 법치주의’만이 우리의 인권과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